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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사태: 얼마나 더 많은 겨울이 지나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시리아 내전사태: 얼마나 더 많은 겨울이 지나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많은 목숨과 가정을 송두리째 앗아간 시리아 사태가 이제 곧 5년에 접어듭니다. 그 동안 난민들은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에 시달렸고, 내전으로 잃어버린 따스한 고향은 이제 먼 기억이 되어버렸습니다. 피난을 와 두 번째 겨울을 맞는 아보 무하메드(Abo Muhammed)씨의 가족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이드나야(SAIDNAYA)- 지금쯤 다마스쿠스 북쪽의 앨파보나 고향집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시간을 보내야 할 나이의 아보 씨는 슬프게도 그러지 못합니다. 70대의 아보 씨가 사이드나야 북쪽의 황량한 놀이공원의 관람차 앞에 앉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꾹 참았습니다.

 

“우리 상황은 너무 어려워요.” 아보 씨가 단념한 듯 말했습니다. 아보 씨 뒤로 보이는 관람차의 강렬한 노란 칠은 아보 씨의 상황과 현저히 대비를 이루는 듯 했습니다. 4년까지만 해도 즐거움과 웃음으로 넘쳤던 공원인데 이제는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아보 씨는 2년 전 그의 아내, 막내 아들 지하드(25)와 앨파보나 고향의 내전으로부터 피신했습니다. 그의 나머지 아들과 세 딸들은 가정이 있어 다마스쿠스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공원 주인은 무하메드 가족이 놀이기구들과 식물들을 대신 봐주는 대가로 경비원의 방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주인은 무하메드 가족이 몇 가지 옷가지와 현금만 가지고 이곳 사이드나야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무하메드 가족은 가족 내 어린아이가 없다는 점 또 매달 충분한 식량을 받을 수 있는 점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위와 싸우는 일

 무하메드 가족의 피난처에 WFP 필드요원 타라(Tala)와 엄 무하메드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이드나야에는 WFP의 식량 원조를 받는 2천여 단위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차가운 경비실 안에서 지내고 있는 무하메드 가족은 방을 덮일 땔감이 없어 온종일 몸을 웅크리고 지냅니다. “우린 전기가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전기난로가 있지만, 거의 켜지 못해요.” 엄(Um) 무하메드씨가 말했습니다. “우린 땔감을 살 돈이 없기에 대부분 시간을 침대 담요 속에서 보내고 있어요.”

 

무하메드 세 가족은 아보 씨의 연금, 아들 지하드가 소형버스를 운전하며 버는 시리아 돈 약만 팔천(미화 80불)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작은 소득으로는 식비, 약값, 공과금, 식량과 땔감을 해결하는 데 충분치 않습니다.

 

무하메드 가족은 전체소득의 절반을 약값에 쓰고 있습니다. 무하메드 부부가 류머티즘, 당뇨 그리고 고혈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 겨울을 나기 위해 기름 1천 리터 정도가 필요하지만, 시리아 돈으로 20만원이 넘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린 공원에 널브러져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요리, 난방을 하곤 해요.” 엄 무하메드 씨가 점심 식사를 차리기 위한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말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다

아보 씨는 2년 전 그의 아내, 막내 아들 지하드(25)와 앨파보나 고향의 내전으로부터 피신했습니다. 아보 씨 가족은 지금 버려진 놀이공원을 피난처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해 서있는 아보 씨의 움푹 들어간 얼굴은 지난 4년간 내전으로 다른 도시나, 이웃 국가로 도망쳐야만 했던 천백만 명의 시리아인의 고충을 대변하는 듯 했습니다. 난방과 식량이 보장된 삶에 대한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고향집의 텃밭, 고양이, 숲의 향기를 떠올립니다. 이러한 작은 추억들은 난민들로 하여금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고향집이 온전한지, 피격으로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언젠가 고향집에 돌아가는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