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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사무소 직원, 사이먼 해커씨의 일기

시리아 사무소 직원, 사이먼 해커씨의 일기
그의 일기장에는 매월 시리아인 400만 명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WFP시리아 사무소 직원들의 평범하지만은 않은 일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리아내전이발발한 4주년이되었습니다. 그인해많은사람들은년째곳을잃고피난길에올랐습니다. 이러한피난민들을구하기위해현장에는 누구보다바쁘게일하는 WFP직원들이있습니다하나인 사이먼해커는 WFP시리아사무소의물류관리자로일하며 매일 전쟁피해자 15 명에게 긴급구호물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의 일기장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지금은 새벽 5시. 아이폰 알람으로 잠을 깼다.
2012년 6월 2012년 6월, 처음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른 직원들처럼 평범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시리아 국방장관의 암살사건과 차 폭탄공격이 일어나고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12월, 우리 모두는 안전을 위해 호텔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침 8시부터 9시 반쯤까지 우리 팀 직원30명이 하나 둘 나타났다. 나는 물류팀 직원들이 트럭과 배급 상황을 보고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식량은 육로와 항공으로 시리아 내부로 들어왔고, 창고에 보관 중 입니다. 다른 트럭들은 각자 식량을 싣고 전국으로 나갔습니다.] 물류팀 직원들은 24시간 내내 창고상황을 문자로 보고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 문자 하나가 바깥상황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지표다. 우리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15만 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아침 10시쯤. 현장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무장 군인들이 데이르에즈조르의 동쪽 길을 막고 있으며, 우리 트럭 두 대가 납치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다른 직원들에게 전화해 사태를 알아보라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우리가 대부분 트럭을 석방시켰다는 것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저를 자세히 봐주세요. 제 얼굴을요. 제가 27살 같이 보이나요?”
“거울이 있지도 않지만, 제가 언젠가 거울을 보게 된다면, 저는 제 얼굴도 못 알아볼 거에요. 저는 제가 27살 밖에 안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제 몸과 마음은 지난 몇 달 동안 훨씬 늙어버렸어요. 우리 모두가 그렇죠.” –수아드는 남편과 3살 난 아들과 함께 데이르 에즈조르에 있는 집에서 몇 달 전에 도망나왔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커녕 약도 구할 수 없습니다. 3살이나 되었지만 이 아이는 혼자 서지도, 말을 하지도 못합니다. WFP/Abeer Etefa 

 운전기사들은 우리 현장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장 한복판을 누비고, 무장 군인들이 둘러싸고 있어도 끝까지 맡은 임무를 처리해 낸다. 분명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들은 매번 위험이 도사리는 골목들을 지나고, 최전방을 들락날락 하고, 몇 번이나 검문소에 구금되기도 한다. 우리 운전기사들 중 한 명은 작전 중에 납치, 감금되어 20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의 발가락은 한번에 하나씩 잘려나갔고, 아킬레스건과 다른 힘줄들도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나. 알라위파였던 그는 당시 지중해연안을 따라 종파간 충돌이 던 때에 반군 수니파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가 운반 중이던 식량은 두 종파 모두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시리아인 창고감독은 나에게 우리 트럭 20대가 레바논 국경에 발이 묶여있다고 했다. 나는 그 트럭들이 급하게 필요한 거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했다.

통역가와 나는 트럭들을 빼내올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장갑차를 타고 관세청으로 향했다. 우리는 책임자를 만났고, 그는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몇 마디 인사와 커피 한 잔을 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몇 통 하더니 이내 우리 트럭이 곧 풀려날 거라고 했다. 그는 WFP가 시리아를 위해 하고 있는 일에 너무나 감사한다고 했다. 우리도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본부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구호식량을 5만 명분 밖에 싣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목표량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시리아, WFP물류창고 WFP/Laure Chadraoui

다마스쿠스에 위치한 우리의 물류 창고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도시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창고는 어느새 전장의 한가운데에 갇혀버렸다. 창고를 방문했을 때, 그간 있었던 강렬한 총격의 흔적을 느끼며 본래 이 창고 안에 있던 식량의 양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40만 명을 위한 식량이 꼼짝 없이 묶여버린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대책을 세우는 기 위해 모든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동분서주했다. 식량 현지 구매 및 수송 경로를 획기적으로 재설정한 것을 필두로 우리는 업무를 재개했다. 또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
돌아오는 길에 시리아인 동료가 가족과 함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줬다. 그 사진은 과연 먼 옛날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했다.
나의 인도주의적 삶은 어릴적 어머니와 함께 온타리오주 남서부에서 봉사를 하며 시작되었다. 유엔세계식량계획과 함께한 지난 7년간, 나는 자연재해나 내전, 혹은 둘 다 겪은 8개국에서 일했다. 그 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생기는 비극적인 상황들을 직접 목격했고, 또 인간이 얼마나 빠르게 상처를 회복 할 수 있는 지도 봐왔다. 폭격소리가 끊이지 않는 시리아 같은 절망적인 곳에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꿈을 꾼다. 그 모습은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주민들은 공격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지금은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유령도시처럼 보인다. WFP/Abeer Etefa

사무실에 돌아오자 마자 나는 상관에게 불려갔다. 수도 외곽지역에 5000 가구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몇 달동안 식량공급을 받지 못했다. 이 지역을 가겠다는 용감한 운전기사가 나타난다 해도, 그는 검문소조차 통과하지 못 할 것이다. 불가능 한 임무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트럭을 찾으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이 불가능한 임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작전이 성공한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다. 시도는 해 봐야 한다.

다른 날에는 트럭들이 다마스쿠스 외부의 창고들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긴급구호식량을 수송중인 있는 트럭 60대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창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지막 검문소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것이 100만 명분의 식량임을 감안하면, 큰일이었다.
10개의 검문소들을 지나, 문제의 마지막 검문소에 도착했다. 800m정도 되는 길의 좌우로는 수많은 자동차들, 무장한 군인들과 탱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와 가방을 빈틈없이 수색했다. 이윽고 군인 하나가 와서 막사 안에서 대령님이 나를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통역사를 통해서 대령에게 우리가 한 달에 4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인들에게 식량을 주려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트럭을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긴 대화 끝에 우리는 한 가지 합의점에 도달했다. 트럭들을 지나가게 해주는 대신, 우리의 작전상황을 그에게 지속적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단 한가지 협상 불가의 조건이 있었다. 저녁 7시와 아침 6시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이 길을 지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곤 악수를 하고, 다음에 다시 들리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Ahlan wa sahlan”.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파테마(24)는 내전직후 다마스쿠스에서 아드라로 피난을 왔다. 18개월 된 딸 하닌은 WFP의 식량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WFP/Abeer Etefa

거의 저녁 6시, 근무시간이 끝나간다. 나는 동료들과 저녁을 하고 통행금지시간이 되기 전에 호텔로 돌아왔다.
세계를 위해 내가 하는 일에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인도주의 활동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매일 수 천명의 인도주의적 요원들은 가끔은 그 대가를 치르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다. 2009년 이슬라마바드에서 일할 때였다. 사무실에 자폭테러범이 들어와 폭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서 5명의 동료를 잃었다. 삶은 한 순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날 나는 파키스탄뿐 아니라 세상 그 어디에서도 우리 일을 방해하려 하는 이들에게 절대 승리를 안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이유다.

파키스탄, 2009
이슬라마바드 공항에서 구호식량 ‘플럼피 도즈’를 하역하고 있다. WFP/Amjad Jamal

 

 계속되는 내전으로 너무나도 지쳐버린 시리아 주민들은 지금 여러분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피난민들에게 식량을, 저희 WFP현장 직원들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