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FP 속의 한국인 "WFP 도움 받았던 한국, 더 많은 기여가 필요합니다" : 북한인권정보센터 김상헌 이사장
사진•인터뷰: 인턴 윤봄이, 김경환
정리: 인턴 이문원
◇WFP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사실 처음부터 식량 원조에 대한 사명감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부양을 위해 좋은 직장을 찾다가 어느새 WFP에 일하게 된 것이었지요. 영국대사관, 미국원조기관 등에서 일하다가 WFP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처음 WFP 한국사무소에서 근무한 것이 1976년도 11월이고, 1994년도에 은퇴했으니 약 20년을 WFP에서 기아퇴치를 위해 일한 셈이네요.
처음에는 한국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도 1월부터는 방콕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에 아프리카 수단, 레소토를 거쳐 마지막엔 가이아나 사무소 대표로 5년 정도 있었습니다. 여러 지역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도주의 활동에 대한 강한 사명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삶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지는 게 인간으로서의 인지상정이니까요.
◇WFP 한국사무소에 재직하면서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제가 76년도부터 WFP 한국사무소에서 일했는데, 당시에 사무소는 마포 노동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른 WFP 현장 사무소처럼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수행하는 사업 규모는 대단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밀가루나 통조림, 식용유 같은 식량 지원을 전국적 규모로 진행했고, 이외에도 어린이집 지원, 영양계몽, 가족계획 사업까지 무수히 많은 일을 했습니다. 강둑 연장이나 하천 개수 사업 등 대규모 하천정비 사업도 WFP가 한국 정부와 협력해서 진행했지요.
당시 우리나라 하천들에 제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장마만 오면 수해가 극심했어요. 그래서 WFP 한국사무소가 했던 것이 하천사업을 수행해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WFP가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실행하고 있는 “Food for Work” 사업방식이지요. 강릉 남대천, 충북 미호천 등에서 WFP가 하천 개수사업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WFP는 한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첫 해부터 참여했습니다. 대규모 간이 상수도 사업을 비롯해 여러 개발 사업을 정부와 함께 했지요. WFP가 지원업무와 모니터링을 수행하면 사업집행은 주로 정부가 하는 형태였습니다. (현재 WFP는 새마을운동의 경험을 계승한 "Food for New Village"사업을 네팔, 르완다 등에서 진행하고 있다.)
◇WFP 국제직원으로서의 활동은 어땠나요?
=처음 국제직원으로 파견돼 방콕에서 일할 때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킬링필드’사태로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태국 국경에 난민캠프가 만들어졌지요. 갈 곳 없는 난민들에게 즉각적으로 식량을 지원해주는 것도 WFP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갑작스런 정치적 격변으로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을 때 단 며칠이라도 식량 공급이 안 된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되니까요. 그렇게 정신 없이 난민들을 돕는 동안 책임감을 느껴 국제적 인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아직 한국도 군부독재 하에 있던 때라 동질감을 많이 느꼈지요.
이후에 수단 등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학교급식 지원사업을 했습니다. 영양이 절실한 시기의 아이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이 일터나 전쟁터대신 학교에서 교육받도록 장려하는 사업이지요.
근무한 곳이 대부분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오지(奧地)였지만, 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인지 오히려 좋았습니다. 가족 문제가 걸렸지만 이미 자식들은 대학에 다니던 때라 다행이었지요.
◇한국은 80년대 말까지 WFP에게서 유엔기구 중 두 번째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수혜국 지위를 벗어나 오히려 모금활동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런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국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에 식량 원조 기구인 WFP가 있는 이유는 세계의 가난한 나라를 돕는 것이 인류의 공동 책임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지요.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립해서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불과 수 십 년 전의 한국이 그랬듯이요.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 전체의 그림 속에서 우리나라가 기여할 몫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해요. 우리의 건국 이념도 홍익인간이듯이 국경을 초월한 인간 중심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더 많이 기여해야 할 실용적인 이유도 있어요.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각 국가의 출연금 규모에 따라 해당 국적의 직원 수를 배정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습니다. 더구나 기여를 많이 하는 나라일수록 국제무대에서 자신감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요. 지금도 네덜란드, 독일, 일본 등은 출연금을 굉장히 많이 내고 있고, 그만큼 국제무대에서 국격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94년도에 WFP를 은퇴하고 한국에 들어왔고, 예전에 인도주의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북한인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실정을 잘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식량은 원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우리 입장에서 정부가 직접 주는 것은 민감하니 국제기구, 다자간 기구를 통해서 주는 것이 좋겠지요. 북한 식량 원조라고 하면 군인들에게 간다는 우려가 많은데, (WFP를 비롯한) 국제기구의 모니터링이 충분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오늘 굶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내일 총을 겨눌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늘 이 사람이 굶는다면 먹여야 하지요. 그 것이 인간의 본분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왜 먼 이국의 사람들이 굶는 것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장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인종도 다른 먼 나라 사람들을 도와야 하나고요. 아프리카에 오래 살다보면 피부색이나 인종적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끼니를 굶으면 같은 고통을 느끼지요. 이제 내 땅 네 땅 할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옆집의 굶는 이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먼 나라의 사람들이 굶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어느 나라 어느 환경에서 태어나느냐는 그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히 한국에서 살게 되었듯이 그들도 우연히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다른 이들의 삶에 관심과 책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굶주리는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작은 손길을 내미는 일에 내 땅 네 땅이 어디 있겠어요. 국제적 식량 원조의 중심에 있는 WFP의 활동을 계속해서 응원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