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 우리의 WFP | #1 나이로비에서 온 이야기 - 장유진 WFP 프로그램 정책 담당관 2편
1편에서 장유진 담당관의 '보통의 하루'를 함께 살펴보았다면, 이번 2편에서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현장에서 함께 뛰는 동료들의 모습, 해외에서 한국인으로 일하는 것의 의미, 그리고 인도주의자로서의 신념과 가치관까지, 유진님이 마주한 사람들과 경험 속에서 어떤 울림과 배움을 얻었는지 들어볼까요?

Q. WFP에서 근무하며 만난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동료들의 진심 어린 순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때로는 일상의 반복 속에 지치기도 하고, 큰 재난 앞에서 무력감에 잠식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의 진심 어린 모습들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전 근무지의 부소장이었던 P는 다소 권위적인 분위기의 유엔 시스템에서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것과 달리, 홍수 피해 현장에 방문할 때마다 물에 잠긴 현장을 큰 키로 뚫고 다니며 상황을 꼼꼼히 살피는 분이었습니다. 난민촌 근처에 제대로 된 관측 시설이 없어 날씨 예측이 어렵다고 하니, 다음날 아침 천진난만한 얼굴로 밤새 혼자 구상해온 여러 아이디어를 들고 와서 저에게 제안하고는 했습니다.
'뭘 이렇게까지... 이게 과연 될까?' 싶은 제 반응에 그는 이곳에서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지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저 사람들에게 이게 필요한걸. 물론 더 좋은 걸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봐야지."
별말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 그 말이 제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M은 소규모 자영농들의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농민분들이 저희의 주요 수혜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늘 그분들의 입장을 최우선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M은 팀 회의든, 큰 컨퍼런스든 거리낌 없이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죠. 때로는 제가 농사와 관련된 단순한 질문만 하러 갔다가 30분 넘게 그들의 현실을 듣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수줍은 M이 농민들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며 우리 기관이 더 노력해야 할 점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이런 동료가 우리 조직에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황이나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열정을 불태우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니, 왜 이렇게까지 하지?' 혹은 '이 친구 너무 순진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새 그들의 진심과 순수함에 제가 물들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런 순간마다 본질에 다시 집중하게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떻게 하면 수혜자 분들, 그리고 수원 정부에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어디선가 읽은 "진실된 열정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문장이 떠오르는데,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저도 언젠가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클리셰 같지만 역시 저희를 다시 본질에 집중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수혜자들입니다.
얼마 전 농기구 지원과 훈련을 마친 가정을 방문한 뒤, "잘 되면 좋겠어요."라고 인사했더니, 수혜자분께서 맑은 눈빛으로 "저도 그래요. 정말 잘 되면 좋겠어요."라고 하셨던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결국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이 잘 되길 바라는 건 당사자들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방법을 고민하게 되는 것도, 제가 이 일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Q. 해외에서 한국인으로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국제개발분야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 근무하는 건 상당히 보람차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특히 최근 공여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음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바뀐 국가라는 점에 국한되어 있고, 일본과 같은 타 아시아 국가의 공여 트렌드와 비교되었다면, 한국이 원조의 규모나 다양성을 매우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현재는 수원국과 유엔 기관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많은 기존 서양권 공여국들이 원조를 줄이고 있는 반면, 한국 정부가 미얀마, 수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정말 원조가 필요한 국가들에 지원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이 외 일상에서도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나 관심이 높아졌고, 그만큼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라고 느낍니다. 외국인 동료들이 먼저 같이 한식당에 가자고 하기도 하고, 제게 어떤 K드라마가 유행인지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이 역시 상당히 자랑스러운 부분이고, 한편으로는 한국인으로서 높아진 자국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Q. 한국에서 인도주의 활동이나 WFP 활동에 대해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국제사회가 점점 더 폐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 같지만, 사실상 무역, 이주, 기후, 전염병 등 현재 중요한 이슈들은 대부분 국제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협력과 개발은 점점 더 중요해질 테고, 이 부분에 있어 국내에서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정부의 원조기관인 USAID가 현 미국 정권 하에 급격하게 감축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New York Times의 <Why We Couldn't Sell America on USAID>라는 기고문을 읽었어요. 기사에서는 USAID가 자국민들에게 성과를 제대로 알라지 못해, 기관이 축소되거나 폐지되어도 그 영향력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2022-23년 동아프리카 대가뭄 때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약 210만 명에서 390만 명 사이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음에도 이러한 원조의 긍정적인 결과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리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기사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한국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많은 국민들이 한국의 지원을 통해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더 이상 영양실조에 시달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기후 재난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 잘 모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WFP와 구호 기관들이 국제사회의 지원 덕분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재난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는지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접하기 때문에, 예방된 재난이나 완화된 고통에 대해서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국과 같은 공여국들의 지원, 그리고 WFP를 포함한 유엔 기구와 NGO들의 활동, 수원국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훨씬 더 큰 재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렇게 막아낸 수많은 재난과 고통에 대해 조금 더 효과적이고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대중 분들이 이런 한국의 지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되, 시혜적인 시선이 아닌 따뜻하고 관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WFP의 '정신(spirit)'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으신가요?
아무래도 On the ground & Deliver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의 생존과 가장 밀접한 식량을 다루는 기구다 보니, 코로나 때도, 지진이나 홍수 등 기후 재난이 발생해도, 전쟁이 나도 가장 먼저 현장에 가고 가장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있는 기구이니까요.
Q. 지금까지 일해본 결과, WFP는 어떤 기관인가요?
'사람 냄새 나는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책을 주로 다루는 기관들보다는 업무나 소통 방식이 비교적 투박할 수는 있지만, 가장 현장과 사람에 가까운 기관입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인도주의자(humanitarian)'란 무엇인가요?
'인도주의자'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인도적 지원 기관에서 일하는 한 사람으로서 제 역할을 돌아보면, 저는 인도주의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접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건 어렵고, 반드시 옳은 방식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 나가려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 여정에 필요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메룬에서 팔레스타인, 방글라데시, 요르단을 거쳐 케냐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를 누비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곁에서 함께 하고자 하는 장유진 담당관의 삶에 대해 나눌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의 수혜자들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장유진 담당관의 이야기 덕에 인도적 지원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수혜자들의 자립, 그리고 더 이상 인도적 지원이 필요해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보통의 하루를 보내며, 동시에 누군가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WFP 인도주의 활동가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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